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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지휘자들의 나치시절 활동, 평가, 행보 - 카라얀, 푸르트벵글러, 카를 뵘

by 빛나는 카레 2024.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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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명성 뒤의 그림자

 

 

빛나는 명성 뒤에도 빛바랜 흔적들이 있기 마련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을 기반으로 하는 지휘자들은 자발적으로나 강제적으로나 나치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카를 뵘, 푸르트벵글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있다. 이들 대부분 종전 후 심문을 받았고 일정 부분 그들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는 형량을 받았다. 어찌보면 가벼울 수도 있고 그들은 억울해 했을 수도 있겠다. 특히 카라얀은 종전후 심문을 통해 상황적 타협이 있었고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었다고 항변했다. 가장 대중적인 클래식 스타이며 황제였으니 대중적 인기에 그의 과거가 약간 가려진 부분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문학수 작가님의 책인 '아다지오 소스테누토'에서는 나치시절의 지휘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어 흥미를 자극했다. 정말로 그들은 음악을 위해 단원들을 위해 비 자발적 활동을 한 것일까? 그들의 행적은 단순한 과거일까 과오일까. 문학수 작가님의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참고해서 당시 유명 지휘자들의 실제 나치 활동들과 후세대들의 평가를 자세히 알아 보도록 하겠다. 
 

푸르트벵글러, 카를 뵘 그리고 카라얀

 
푸르트벵글러는 나치와 협력하면서도 종종 갈등을 빚었다. 그는 1933년 베를린 국립 오페라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히틀러를 위한 공연도하고, 히틀러의 오른팔이었던 괴벨스와 협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푸르트벵글러는 자신이 아끼는 단원들 그리고 음악가들을 보호하려는 목적 때문에 나치와 불협화음이 있었다. 그는 히틀러와 나치를 싫어했고 나치를 거리의 부랑자라 비유하고 음악분야에서의 유대인들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였다. 이런 대조적인 언행과 행보 때문에 그의 '활동'들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음악가와 독일 음악의 무결성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타협과 노력으로 볼것인지, 나치에 대한 동참으로 볼것인지 말이다. 
 
카를뵘은 기회주의적으로 나치 정권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실제로 뵘은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던 1938년에 빈 필하모닉 포디엄에서 히틀러식 경례를 올렸으며 합병 환영의 제스추어 까지 취했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나치에 대한 충성으로 그는 승승장구 하였다. 1943년에 빈 국립오페라 극장의 음악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를 뵘은 마지막까지 나치 당에 입당하지는 않았다. 
 
한편 클래식 황제 카라얀은 상대적으로 나치 활동에 대해서 그의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오직 음악을 위한 타협이였다는 태도였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였던 것 같다. 하지만 카라얀은 1933년 스물 다섯이라는 어린나이에 나치당에 가입했다. 그는 종전 후에 그의 나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항변하였다. 

 

 

나는 1935년 아헨에서 음악총감독이 되려 할 때 당원이 되었다. 내가 숙원해온 목표를 바로 눈앞에 둔 3일 전에 시장이 찾아와서 '당신은 아직 당원이 아니지요? 지역구 당책임자에 따르자면, 이 자리는 당원이 아니고는 맡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그래서 입당 서류에 서명 했다. (출처: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문학수 저)

 
그러나 그는 굉장히 적극적으로 나치활동을 하였다. 그가 나치당에 가입한 것은 1935년이 아닌 1933년 4월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당원번호는 '1607525' 였다.(3430914번도 있음) 그 이후 그는 젊은 나이에 아헨극장 음악총감독에 오르고, 2년 후 빈 국립오페라극장에 데뷔하고 출세가도를 달렸다. 문학수 작가님의 표현에 따르면 푸르트벵글러는 나치에 협력하면서도 거리를 두었고, 카를 뵘도 소심하게 나치의 눈치를 보았지만 카라얀은 아예 대놓고 '나치의 일원'으로 출세 가도를 달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는 선배들에 비해 한참 어린 신출내기 였기 때문에 혼돈속에서 선배 음악가들이 유럽을 떠나고 생긴 공백을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종전 이후 그는 그의 형량을 다 마쳤다. 바로 '2년 동안의 연주 금지'. 
 
카라얀은 베를린 필의 수장인 푸르트벵글러의 사후 본격적으로 '카라얀'의 시대를 연다. 디지털 음반 시대를 연 장본인이며, 녹음 음반의 수도 어마어마 하다. 그리고 베를린 필과의 과감한 딜로 종신 계약까지 얻게 된다. 클래식 독점이라는 측면도 있었지만 이런 기울어진 형세 덕분에 연주회 가격 인상과 이에 따른 단원들의 봉급 인상이라는 베네핏과 그에 따른 존경이라는 공고한 성을 쌓았다. 카라얀은 음악의 천재이기도 하지만 사업가적인 측면에서도 천재가 아닐 수 없었다. 
 
현대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마에스트로지만 예술과 정치는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예술이 모든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할 순 없다고 본다. 특히나 타인의 자유와 권리에 침해를 입히면서까지. 카랴얀의 카리스마와 절도 있는 지휘와 덕분에 양질의 디지털 음반과 클래식의 대중화에 감사함을 느끼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마음은 지울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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